
사건의 충격은 언제나 결과에서 시작되지만, 진실은 대개 그 이전의 시간 속에 숨어 있다. 13세 소년이 칼을 들었다는 충격적인 장면 앞에서 우리는 반사적으로 ‘왜?’가 아니라 ‘누가?’를 묻는다. 이 질문은 죄의 무게를 누군가에게 돌리는 가장 빠른 방식이지만, 동시에 진실로부터 멀어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영국 드라마 <소년의 시간>(Time of a Boy)은 이 간극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아빠, 나 아무 짓도 안 했어.”라는 절박한 외침은 순수함과 폭력성 사이에서 균형을 잃은 현대 청소년의 초상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한 소년의 일탈은 단지 개인의 도덕적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 드라마는 그 사건을 만들어낸 ‘사회적 풍경’을 추적한다. 그것은 학교, 가정, SNS, 상담실, 그리고 그 속의 수많은 어른들의 눈길과 말투, 무관심과 책임 회피까지를 아우르는 복합적인 층위의 서사다.
어른들의 시선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
넷플릭스 4부작 드라마 <소년의 시간>은 각기 다른 시점에서 동일한 사건을 해석하며 어른들의 무력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첫 번째 회차에서는 경찰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치고, 한 가정의 시간이 부서진다. 폭력은 그 순간 폭발한 것이 아니며, 아이는 어느 날 갑자기 괴물이 되지 않는다. 그 이전의 시간을 추적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어른됨’의 시작이어야 한다.
2회에서는 형사 루크가 학교를 방문한다. 그는 교과서적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며 아이들의 내면을 파악하려 하지만 번번이 헛다리를 짚는다. SNS라는 새로운 언어 안에서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세계를 구축해놓았고, 어른들은 그 외곽을 어슬렁거릴 뿐이다. 루크의 아들이 말한다. “아빠는 애들이 뭐 하는지 몰라.” 이는 단지 대사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그 세계에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3회에 등장하는 심리상담사 브라이어니 역시 실패를 거듭한다. 그녀는 가정 내의 남성성을 의심하며 제이미를 몰아붙인다. 그러나 이 소년은 어른처럼 분노하다가도, 상담이 끝났다고 하자 아이처럼 울며 매달린다. 이는 현대 사회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빠르게 ‘어른의 감정’을 강요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들의 울음은 진작에 터졌어야 할 것이었지만, 자리를 찾지 못하고 미뤄진 채 응어리로 남는다.
‘안전한 방’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4회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제이미의 아버지 에디가 흐느끼며 말하는 장면이다. “나는 한 번도 아이를 때린 적이 없어요. 아이는 늘 자기 방에 있었고, 아무 일도 없었어요.” 이 말은 현대 부모들의 착각을 상징한다. 폭력은 육체적 접촉으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방’이라는 공간이 보호막처럼 여겨졌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아이들의 방은 온라인으로 연결된 광장이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침묵 속에서 자란다.
SNS 공간에서 아이들은 익명의 칼날을 주고받으며,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상처를 입고 자란다. 이는 단지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작은 불화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언어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폭력의 형태’다. 드라마는 그것을 일상의 풍경 속에 담담히 배치하며, 그 파괴력이 얼마나 조용하게 다가오는지를 고발한다.
원테이크의 선택, 편집되지 않은 삶
<소년의 시간>이 원테이크 기법을 사용했다는 점은 단순한 기술적 실험에 머물지 않는다. 이는 드라마의 주제 의식과 밀접하게 연결된 연출적 선택이다. 편집되지 않은 화면은 곧, 편집되지 않은 삶을 뜻한다. 카메라는 거짓 없이 한 인물의 움직임과 감정을 끝까지 따라간다. 이는 우리 삶의 비극이 얼마나 일상의 흐름 속에서 누적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모든 폭력은 누군가의 일상 속에서 싹튼다. 그리고 그 순간, 그것을 편집해줄 감독도, 경고해줄 자막도, 반전의 복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도 수많은 아이들이 ‘원테이크’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소년의 시간을 듣고 있는가
결국 이 드라마는 누군가의 비극적인 범죄를 소재로 삼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오래도록 ‘소년의 시간’을 듣지 않았는가에 대한 자성의 메시지를 전한다. 아이들의 언어, 아이들의 감정, 그리고 그들의 울음과 침묵에 우리는 귀 기울인 적이 있었는가? 소년의 시간이 멈췄을 때, 어른의 시간은 어떤 책임을 지는가?

이 시대의 ‘소년’은 과연 누구인가? 그는 SNS로 소통하고, 온라인 게임으로 세계를 배우며, 어른들의 세계에 일찍 편입된 ‘가짜 어른’일 수도 있고, 감정을 억누른 채 자기 방에 고립된 ‘진짜 아이’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 모든 복잡한 존재를 하나의 단어, 하나의 행위로 정의하려 한다. 그러나 ‘소년의 시간’은 우리에게 묻는다. 그렇게 말할 자격이 과연 있는가?
#소년의시간 #넷플릭스드라마 #청소년폭력 #SNS괴롭힘 #사이버불링 #원테이크드라마 #부모역할 #심리상담 #현대가족문제 #아이들의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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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충격은 언제나 결과에서 시작되지만, 진실은 대개 그 이전의 시간 속에 숨어 있다. 13세 소년이 칼을 들었다는 충격적인 장면 앞에서 우리는 반사적으로 ‘왜?’가 아니라 ‘누가?’를 묻는다. 이 질문은 죄의 무게를 누군가에게 돌리는 가장 빠른 방식이지만, 동시에 진실로부터 멀어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영국 드라마 <소년의 시간>(Time of a Boy)은 이 간극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아빠, 나 아무 짓도 안 했어.”라는 절박한 외침은 순수함과 폭력성 사이에서 균형을 잃은 현대 청소년의 초상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한 소년의 일탈은 단지 개인의 도덕적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 드라마는 그 사건을 만들어낸 ‘사회적 풍경’을 추적한다. 그것은 학교, 가정, SNS, 상담실, 그리고 그 속의 수많은 어른들의 눈길과 말투, 무관심과 책임 회피까지를 아우르는 복합적인 층위의 서사다.
어른들의 시선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
넷플릭스 4부작 드라마 <소년의 시간>은 각기 다른 시점에서 동일한 사건을 해석하며 어른들의 무력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첫 번째 회차에서는 경찰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치고, 한 가정의 시간이 부서진다. 폭력은 그 순간 폭발한 것이 아니며, 아이는 어느 날 갑자기 괴물이 되지 않는다. 그 이전의 시간을 추적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어른됨’의 시작이어야 한다.
2회에서는 형사 루크가 학교를 방문한다. 그는 교과서적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며 아이들의 내면을 파악하려 하지만 번번이 헛다리를 짚는다. SNS라는 새로운 언어 안에서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세계를 구축해놓았고, 어른들은 그 외곽을 어슬렁거릴 뿐이다. 루크의 아들이 말한다. “아빠는 애들이 뭐 하는지 몰라.” 이는 단지 대사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그 세계에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3회에 등장하는 심리상담사 브라이어니 역시 실패를 거듭한다. 그녀는 가정 내의 남성성을 의심하며 제이미를 몰아붙인다. 그러나 이 소년은 어른처럼 분노하다가도, 상담이 끝났다고 하자 아이처럼 울며 매달린다. 이는 현대 사회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빠르게 ‘어른의 감정’을 강요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들의 울음은 진작에 터졌어야 할 것이었지만, 자리를 찾지 못하고 미뤄진 채 응어리로 남는다.
‘안전한 방’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4회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제이미의 아버지 에디가 흐느끼며 말하는 장면이다. “나는 한 번도 아이를 때린 적이 없어요. 아이는 늘 자기 방에 있었고, 아무 일도 없었어요.” 이 말은 현대 부모들의 착각을 상징한다. 폭력은 육체적 접촉으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방’이라는 공간이 보호막처럼 여겨졌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아이들의 방은 온라인으로 연결된 광장이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침묵 속에서 자란다.
SNS 공간에서 아이들은 익명의 칼날을 주고받으며,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상처를 입고 자란다. 이는 단지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작은 불화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언어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폭력의 형태’다. 드라마는 그것을 일상의 풍경 속에 담담히 배치하며, 그 파괴력이 얼마나 조용하게 다가오는지를 고발한다.
원테이크의 선택, 편집되지 않은 삶
<소년의 시간>이 원테이크 기법을 사용했다는 점은 단순한 기술적 실험에 머물지 않는다. 이는 드라마의 주제 의식과 밀접하게 연결된 연출적 선택이다. 편집되지 않은 화면은 곧, 편집되지 않은 삶을 뜻한다. 카메라는 거짓 없이 한 인물의 움직임과 감정을 끝까지 따라간다. 이는 우리 삶의 비극이 얼마나 일상의 흐름 속에서 누적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모든 폭력은 누군가의 일상 속에서 싹튼다. 그리고 그 순간, 그것을 편집해줄 감독도, 경고해줄 자막도, 반전의 복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도 수많은 아이들이 ‘원테이크’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소년의 시간을 듣고 있는가
결국 이 드라마는 누군가의 비극적인 범죄를 소재로 삼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오래도록 ‘소년의 시간’을 듣지 않았는가에 대한 자성의 메시지를 전한다. 아이들의 언어, 아이들의 감정, 그리고 그들의 울음과 침묵에 우리는 귀 기울인 적이 있었는가? 소년의 시간이 멈췄을 때, 어른의 시간은 어떤 책임을 지는가?
이 시대의 ‘소년’은 과연 누구인가? 그는 SNS로 소통하고, 온라인 게임으로 세계를 배우며, 어른들의 세계에 일찍 편입된 ‘가짜 어른’일 수도 있고, 감정을 억누른 채 자기 방에 고립된 ‘진짜 아이’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 모든 복잡한 존재를 하나의 단어, 하나의 행위로 정의하려 한다. 그러나 ‘소년의 시간’은 우리에게 묻는다. 그렇게 말할 자격이 과연 있는가?
#소년의시간 #넷플릭스드라마 #청소년폭력 #SNS괴롭힘 #사이버불링 #원테이크드라마 #부모역할 #심리상담 #현대가족문제 #아이들의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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